이준익 감독은 '동주'가 윤동주의 전기 영화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 '동주'는 윤동주라는 민족 시인을 최초로 영상화했다는 데 의미가 있었지만 단순히 짧았던 스물 여덟해동안 빛났던 미완의 청춘을 연대기 위에 펼쳐내려 한 작품도, 윤동주의 문학 세계에 도취된 감상적인 작품도 아니었다는 점은 영화의 상당히 낯선 이면과 마주하게 만들었다. 가능한 사실에 입각해 철저한 고증을 거쳐 만들어낸 산물이었지만, 깊이를 가늠하지 않으면 실감할 수 없는 영화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는 건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준익 감독이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영화 '동주' 인터뷰에서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한 시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 News1star / 고아라 기자
"윤동주(강하늘 분)와 송몽규(박정민 분)를 통해 일본 군국주의의 모순과 부조리, 부도덕성을 증명하고 싶었다"는 이준익 감독의 말은 연출자 개인의 주관성이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준익 감독은 인터뷰 내내 "두 사람을 통해 증명해낸 것 말고 내가 부여한 건 아무 것도 없다"고 강조했다. 스스로 내면과 마주하고 자아를 성찰한 윤동주라는 개인에게 집중한 것 역시 감독이 증명하고 싶었다고 했던 그 모순과 부조리, 부도덕성을 그려내기 위한 총체적인 과정 중 하나였으리라 짐작됐다.
그것이 우리가 '동주'를 감상주의에 젖어 관람하는 것을 경계했어야 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식민 시대의 상처로 아파만 해야 할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변별력을 분명하게 갖췄으면 한다는 것이 거장의 바람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영화 '아나키스트'를 기획하고 일제 식민지와 관련한 책 100권 이상을 검토하며 시작된 관심이 오늘의 '동주'를 완성했다. 지난 날, 외화 수입 당시 한국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을 계기로 시작된 역사에 대한 거장의 뿌리 깊은, 애정 어린 시선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이준익 감독이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영화 '동주' 인터뷰에서 배우 강하늘, 박정민을 캐스팅할 당시를 회상했다. © News1star / 고아라 기자
Q. 필모그래피를 보면 쉬이 알 수 있듯 이준익 감독은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이 가장 큰 감독 중 하나다. '동주'는 어떠한 관심이 시발점이 된 작품일까.A.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아나키스트'라는,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작됐을 거다. 그때 당시 책들이나 자료들을 100권 이상을 검토한 적이 있었는데 영화가 실패하면서 한동안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윤동주와 송몽규가 어떻게 보면 아주 가까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 세대가 아닌가 싶더라.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보다 먼저 살다간 분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됐고, 계속 지속되게 됐다.
Q. 그런 인물들에 집중하기 위해 반드시 윤동주여야 했던 이유가 궁금하다.A. 그것이 꼭 윤동주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 시대에 강요된 선택을 했던 사람들을 지금, 현재의 시각에서 풀어보고 싶었다. 4년 전 교토 영화제에 초청을 받아 갔다가 일본 도시샤 대학에 있는 윤동주 기념비를 본 적이 있었다.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학교를 다니다가 검거를 당한 곳이다. 후문에 들어서 보니 교정 아래에 기념비가 있더라. 일본 땅에 그런 기념비가 있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정지용 시인의 시에 나온 압천도 걸어봤다. 70년 전, '여기를 걸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몸으로 느껴보려 했다. 그걸 꼭 영화로 찍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계기가 그때였다.
Q. 총 19회차, 순제작비 5억 원 규모에서 상당한 퀄리티의 영화가 나올 수 있다는 사례가 되겠다. 제작비가 흔히 남용되고 있는 현 영화계에서 이준익 감독과 같은 연출자의 경제적인 작품 규모가 시사하는 바가 클 것 같다.A. 윤동주라는 인물로 영화를 찍고 싶은데 상업 영화로 찍기에는 불가능한 지점들이 많았다. 일단 시대를 재현할 수 있는 공간이 너무 없었다. 사라진 공간들을 다시 만들어내기엔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겠다는 생각이 들어 흑백 저예산으로 찍어야겠다고 결정했다. 시나리오를 쓴 신연식 감독과 모든 저예산의 노하우를 총동원해 만들었다.
이준익 감독이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영화 '동주' 인터뷰에서 윤동주와 함께 송몽규를 등장시킨 이유를 밝혔다. © News1star / 고아라 기자
Q. 영화가 흑백 영화인 이유는 제작비 때문이라고 했지만 윤동주 시인의 흑백 사진이 흑백 영화로 만들게 한 가장 큰 이유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전에 '님은 먼곳에'를 찍을 당시에도 사진 한 장이 이준익 감독에게 큰 영감이 돼준 것으로 알고 있다.A. 우리 어머니, 아버지 시대의 흑백 사진은 누구나 집에 한 장씩 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흑백 사진에 멈춰진 시간 같은 것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 교과서에도 실린 윤동주의 사진을 보면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나. 그가 남겨놓은 시집 안에 있는 시어들이 70년이 지나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는데 우리는 그의 시만큼, 그의 삶을 알고 있는가 자문해보게 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런 생각들이 영화를 만들도록 추진력이 돼줬다.
Q. 송몽규는 윤동주의 내면과 마주하는 것 만큼이나 생경한 인물이었다. 윤동주라는 인물에 홀로 집중하는 것보다 영화적이고도 극적인 느낌이 나지만, 송몽규를 통해 윤동주라는 인물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읽힌다. A. 영화가 할 수 있는 좋은 것들 중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서 사람의 본질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매체라는 점이다. 인간은 혼자서는 결코 살 수 없는 동물이다. 누군가와 같이 이 시대를 살아갈텐데 한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은 그와 함께 했던 시간 안에서만 가능하지 않나. 윤동주에게는 수많은 가족이 있었지만 유독 송몽규와 특별했다. 중국 용정이라는, 같은 곳에서 태어나서 후쿠오카 형무소라는, 같은 곳에서 생을 마감한 특별한 관계였다. 두 사람의 비교 가치, 생각의 차이도 있지만 행동의 차이도 있다. 지금의 상황에 대입했을 때 두 인물의 선택이 더 크게 와닿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Q. 윤동주가 지금의 관객에게 시대에 저항한 거창하고 이상적인 위인처럼 비쳐지진 않는다. 인물 개인의 내면에 집중한 덕일 것 같다. A. 모든 영웅과 위인은 후대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가공되는 게 많다. 태어날 때는 영웅과 위인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한 개인으로 태어나지 않았겠나. 그 시대에 순응하면서 살 수도 있는데 굳이 거역하면서 부딪히는 인간들이 영웅이 되고 위인이 되는 거다. 윤동주의 성장 과정을 보면 그는 위인이기 이전에 그저 소심한, 한 개인이다. 거대한 성과를 올린 것만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한 인간으로 버텨내면서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것. 그게 위인이다. 어쩌면 이 시대에서도 많은 젊은이들 중에 위인으로 남을 사람이 누군가 있다는 거다. 100년 후에 우리 주위에 누가 위인으로 남을지 모른다.
이준익 감독이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영화 '동주' 인터뷰에서 작품에 주관성을 반영하지 않으려 했다고 털어놨다. © News1star / 고아라 기자
Q. 제작보고회 당시 오늘의 청춘에게 '동주'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느냐는 질문이 오갔다. 그때 "감독이 메시지를 알려주는 건 그 자체로 불법"이라고 한 적이 있다. 이 같은 작품이 청춘들에게 반향이 클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런 답변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A. 내가 말하고 싶어하는 건 중요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그리고 주변인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게 기록돼 있을 뿐이다. 그때 당시 두 사람을 영화를 통해 증명해낸 것 말고 내가 부여한 것도 없다.
Q. '연출'이 아니라 '증명'이라 함은.A. 엔딩에 그 이유가 있었다. 우린 늘 그동안 식민지 시대 피해자의 억울함만 강조한다. 그건 반쪽 짜리 애정이다. 가해자의 모순과 가해자의 부도덕성에 대해 우린 잘 연구하지 않았다. 프랑스, 헝가리, 체코 등 유럽은 나치의 피해를 수년동안 받았고 그 전쟁이 끝나고 나서 나치의 파시즘을 철저하게 파헤쳐서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그런데 우린 일본의 군국주의 아래 30년을 있으면서 억울함만 계속 하소연했다. 그래서 내가 증명이라고 말한 것이다.
Q. 답변이 다소 낯설게 다가오기도 한다. 흔히 관객들은 우리와 별다를 바 없는 윤동주의 청춘과 그의 내면, 그리고 부끄러움의 미학에 집중할 것이다.A. 우린 대개 윤동주와 송몽규에게만 주목한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을 통해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부도덕성과 모순을 지적해야 하는 게 이 영화의 존재 이유다. 일본의 군국주의를 철저하게 해부하고 파헤칠 필요가 있었다. 윤동주가 반론하고 송몽규가 그 모순에 대해 말하지 않나. 문명국과 비문명국을 나눈 일본의 모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희생에 대해서 말이다. 일본 군국주의의 모순과 부도덕성을 두 인물을 통해 증명해보고 싶었던 거다. 현상에 대한 변별력이 호도되거나 은폐된 상태에서 우린 여전히 피해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정확한 자료와 연구, 그리고 증명이 필요하다. 이 영화도 감상주의에 빠져서 보다보면 본질을 놓칠 수가 있다.
이준익 감독이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영화 '동주' 인터뷰에서 역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 News1star / 고아라 기자
Q. 그런 상위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티켓 파워가 강한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싶었던 바람도 있었을까. 유아인이 '동주'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던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A. 유아인이 하고 싶어했다는 건 나로서는 땡큐였다. (웃음) 당시 이미 '사도'를 찍은 직후였거든. 이미 그가 좋은 배우라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윤동주 그대로가 아니라 자칫 대세 유아인의 윤동주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예산 영화와 대세 배우는 상충되는 지점이 있다. 강하늘은 영화 '평양성' 때 함께 했었다. 그 친구가 스무살 때 보여준, 꾸미지 않는, 기술이 인위적이지 않은 연기의 본질을 보여준 것이 인상 깊었다. 황정민이 지난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강하늘과 함께 추천한 배우가 박정민이었는데 그 친구는 '신촌좀비만화'에서 보고 연기를 너무 잘해서 감탄한 적이 있었다. 송몽규 역할의 캐스팅 조건이 있었는데 대중들이 잘 모르는 배우여야 한다는 점, 연기력이 출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송몽규의 발견과 배우의 재발견이 다 함께 맞아야 한다고 봤다. 박정민은 그간 저예산 영화에서 충분히 경험을 쌓은, 정말 좋은 배우였다.
Q. 배우의 훌륭한 열연과 맞물려서 배치한 윤동주의 시도 아름다웠다. A. 시를 단순히 감상에 빠져서 썼다면, 진실되지 않고 관념적인 글에 지나지 않았다면, 윤동주의 시가 지금까지 남아있었을까. 그는 비극적인 시대에서 스스로의 부끄러움과 직면하고 아파했던 사람이었다. '자화상'이라는 시가 클라이맥스인 이유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타자화시키면서 자신의 내면과 직면하지 않았나. 송몽규에 대한 열등 의식이 윤동주 나름의 신념을 지켜낼 수 있도록 했을 거다. 그게 윤동주의 정신을 변질되지 않도록 만들어준 원천이었을 거다. 극 중 정지용 시인이 말하지 않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것'이라고. 윤동주는 한글을 말살시킨 일제의 조선어 금지 정책이 시행됐던 와중에도 끝까지 한글로 시를 쓴 사람이다. 한번 스스로 생각해보라. 한글을 쓰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당신은 한글을 쓸 수 있는지.
Q. '동주' 이후에도 저예산 영화 연출에 나설 계획이 있나.A. 이번엔 윤동주라는 위인, 그리고 수준 높은 스태프들과 실력 있는 배우들의 공이 컸다. 난 단지 그런 그들을 모아서 같이 하자고 했을 뿐이다. 이들이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 셈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내가 뭘 할 수 있었겠나.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했지만 이런 영화를 지속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장담은 할 수 없겠지. 하하.
뉴스1스타 장아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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